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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폭력'에 익숙해진 한 남자의 일기


2007년 2월 4일 일요일

일요일이다. 한 주 동안 세상살이에 받은 스트레스로 '남자'는 자신의 육체를 물에 젖은 화장지마냥 너덜너덜하게 그렇게 방구석에 내팽개쳐 둔다.

시계가 12시를 지나간다. 남자는 주섬주섬 옷가지를 챙겨 입고 아파트 베란다에서 옹색하게 움츠려 눈치 담배 한 모금을 들이마시는 것으로 아무렇게나 내팽개쳐 두었던 자신의 몸뚱아리를 수습하기 시작한다. 남자의 일요일은 으레 이렇게 시작되곤 한다.

지난 밤, 다른 사람에게 보여줄 고상함을 위해 독서를 했던 남자는 충혈된 눈으로 텔레비전의 전원 스위치를 누른다. HD 고화질의 첨단 기술력을 자랑하는 삼송의 LCD 텔레비전은 남자를 놀리기라도 하듯, 약 3초 동안 "삐삐삐~"하는 기계음을 들려준 뒤, "띠리링"하고 켜진다.

때마침 텔레비전에서는 시청률 50%를 넘기고야 말았다는 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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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의 '주목'이 재방송된다. 재수가 좋다. 오늘은 60분 중 거의 80%의 시간이 전쟁신이다. 칼이 부딪치는 소리, 칼이 살을 베는 소리.그리고 사람의 비명소리.

실제로 들어본 적은 없으나 이미 남자의 귀에는 아주 익숙한 소리들이다. 그리고 남자는 많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들어왔던 소리이니 실제로도 그런 소리가 날 것이라 여기고 있다. 이제는 별로 섬찟할 것도 없는 소리들과 함께 주목의 강철검에서 선혈이 뚝뚝 떨어진다. HD 화질을 자랑하는 삼송의 기술력은 드라마 제작자들로 하여금 토마토 케첩으로 피를 대신할 수 없게 한다. 진짜 같은 붉은 피가 텔레비전 화면에 가득하다.

어릴 적 전쟁을 경험했던 할머니와 함께 텔레비전을 보았던 남자는 이따금씩 '케첩같은 피'가 등장(?)하는 장면이 나올 때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채널을 잠깐씩 봐야만 했던 과거를 떠올리고는 씩 웃음을 짓는다. 주목의 광팬인 남자의 아내는 여섯 살 난 아들과 함께 텔레비전 속 영웅을 짝사랑하다가도 남자에겐 너무나 흥미로운 전투신이 나올 때마다 채널을 돌리곤 한다. 자식 걱정을 하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남자는 아내에게 짜증을 내면서도 어쩐지 시골에 계신 우리 늙으신 할머니께서는 요즘 사극에 통 관심이 없으시다는 것을 머릿속에 떠올려 낸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이 남자는 동북공정으로 한창 시끄러울 때 시작한 이 드라마에서 고구려라는 나라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다. 그리고 봐도 잘 모르겠다. 그에게는 주목이 한 편의 멋진 액션 사극일 뿐이다.

주목이 끝났다. 남자는 베개 위로 고개를 빼꼼 내어놓고 총을 겨누는 군인처럼 텔레비전에 대고 리모컨을 쏘아댄다. 리모컨 사격으로 남자는 공중파 방송의 시시한 프로그램들-예를 들면 사랑해요 리퀘스트 같은-을 없애 버리고 전인곤도 본다는 스카이 나이프(sky knife)로 채널을 옮긴다.
오호~ 좋은데. '엠비스-이에서피나' 채널에서 우리 나라의 거인과 미국 거인의 싸움을 또 한 번 재방송한다. 남자는 이미 그 경기를 거짓말 보태 100번쯤 보아왔다. 텔레비전에서, 신문에서, 인터넷에서, 싸이에서... 하지만 남자는 용만이가 밤셋의 코를 깨뜨리는 걸 101번째 보면서 다시 한 번 통쾌해 한다.

남자는 문득 텔레비전에서 이종 격투기를 처음 접했을 때의 충격을 떠올린다. 남자가 처음으로 본 이종 격투기는 UFC였었더랬다. 아마도 '엑스띄엄' 채널이었을 것이다. UFC를 처음 보던 날, 신부 드레스에나 어울리 듯한 하얀색 천으로 된 링 위에 낭자한 핏자국들을 보며 얼굴을 찌푸렸었더랬다. 얼굴에 피칠갑을 하고 있는 선수들이 나오거나, 간혹 팔이 꺽어지고 부러지는 장면들이 나오면 가슴을 콩닥거리며 채널을 잠깐씩 딴 곳으로 돌렸다 다시 맞추기를 반복하곤 했었다. 마치 국민학교 때(딴 뜻은 없다. 그저 남자는 초등학교가 아닌 국민학교를 다닌 세대임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동무들과 함께 여학생 화장실을 훔쳐볼 때-나이가 커서 그랬더라면 치한으로 쇠고랑을 찼을지도 모를 일이었던- 느꼈던 것과 비슷한 두근거림과 불안함, 죄스러움를 동시에 느꼈었더랬다.

잠깐 동안의 과거 생각 끝에 남자가 내어놓은 건, 피식하는 웃음이다. '엑스띄엄'을 정말 시청자를 띄엄띄엄 보는 채널이라며 마음속으로 욕했던 남자는 이제 323번은 발가락으로도 누를 만한 경지에 올랐다. 그래도 UFC가 충격적이기는 하지만 K-1, Pride FC 등으로 단련된 남자의 눈에는 이제 더이상 충격적일 것은 없었다.

별생각없이 인기에 편승하는 '뇌입어'나 '단음', '아파서' 같은 보따리사이트들은 먼 이국땅, 그것도 주로 우리 할아버지들이 강제노동으로 생을 마감한 땅에서 열리는 경기를 매번 재빠르게 들여와 그럴싸하게 포장해 판매한다. 자동차 게임을 하기 위해 고사리손으로 이제 겨우 주소창에 '야웅'이라고 쳐넣는 방법을 배운 여섯 살 난 남자의 아들 녀석도 이젠 제법 용만이 흉내를 내려 한다.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 했거늘, 아무리 개보다 팔자가 나쁜 사람들이 득시글대는 세상이라지만 개만도 못하랴. 남자의 아이는 어쩌면 커서 멋진 용만이2가 될 거라는 꿈을 키우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남자는 마음속으로 생각한다.
'정말 멋있는 스포츠야'
그랬다.
그러면서도 남자는 요즘처럼 '스포츠'라는 말이 폭넓게 사용된 적은 없었다며 의아해 하기도 한다.
하지만 남자는 불구경과, 싸움 구경이 제일 재미있다는 말은 왠지 천하고 비도덕적으로 느껴지지만, 싸움이 스포츠가 되고, 드라마가 되고, 영화가 되면 그것은 우리의 정신을 한껏 고양시킬 수 있는 것으로 한 차원 승화된다는 생각으로 자신의 의아함을 덮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드라마와 스포츠를 감상했으니 이젠 영화나 한 편 볼까?
'조폭 소녀', '두씨부렁 일체', '가문의 일기'...? 시시하고 유치한 폭력이다.
적어도 문화인이 되려면 '올빽보이'나 '동무', '수류탄 내던지며' 정도는 봐주어야 한다.
올빽보이를 다시 한 번 보기로 한다. 상을 받은 영화는 뭔가 달라도 다르다.
노루발장도리로 이빨을 뽑아내고, 가위로 혀를 잘라내는 장면에서는 아직도 움칫 몸서리를 치곤 하지만 그정도의 시련은 명화를 보기 위해 필연적으로 견뎌내야 하는 것이다.
아! 유진태가 스스로 머리에 총을 쏘고 엘리베이터를 빨갛게 물들이는 장면을 보면서 남자는 카타르시스를 경험한다.

명화를 보고 난 후 남자는 시사적인 교양을 갖추기 위해 뉴스를 시청하기로 한다.
엄기용 앵커의 익숙한 목소리가 또 한 번 썩어빠진 우리 사회에 경종을 울린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한 초등학교 학생이 숙제를 해오지 않아 담임선생님이 회초리로 손바닥을 때리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손바닥이 빨갛게 되었다고 합니다. 학생들이 인권이 유린당하고 있는 현장에 연보엄 기자 나가 있습니다.연보엄 기자~"

남자의 반응은 즉각적이다.
"이런 XX 같은 놈,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학생을 때려? 학원 선생님도 아닌 주제에 말이야"

잠깐 흥분한 마음을 가라앉히려는 남자에게 들려오는 다음 뉴스.

'정부는 이라크 '잘있던 부대'의 파병 동의안을 국회에 제출했습니다. 그리고 2007년에는 세계 평화를 위해 우리의 용감한 턱전사 부대를 레바논에 파병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남자는 우리의 막강한 국력에 마치 제가 파병군이라도 되기나 한 양 어깨를 으스댄다.

남자는 그렇게 또 하루를 총, 칼, 주먹으로 얼룩진 핏빛 세상 속에서 살아내었다.

그리고 그날 밤 남자는 결혼을 하였거나, 혹은 비슷한 위치(?)에 있는 남자들만이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조금은 차원이 다른 폭력의 주체가 되어, 조금씩 꿈 속으로 스러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