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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파울로 코엘료의 '11분' - 性을 통해 바라본 인간 문명의 폭력성


 

플라톤에 따르면, 천지창조 초기에는 남녀가 오늘날과 전혀 달랐다고 해요. 하나의 몸, 하나의 목, 그리고 각자 반대 방향을 바라보는 두 개의 얼굴이 있는 남녀 양성의 존재들만 있었죠. 마치 두 피조물의 등이 붙어 잇는 것처럼 성기가 둘이고 팔 다리는 네 개씩이었다오.
그런데 질투심 많은 신들이 글 피조물은 팔이 네 개라 일을 훨씬 더 많이 하고, 얼굴이 두 개라 번갈아 잠을 잘 수 있는 바람에 몰래 공격할 수 없고, 다리가 넷이라 큰 힘을 들이지 않고서도 오래 서 있거나 먼길을 걸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소. 무엇보다 위험한 것은 그 피조물이 양성(兩性)이어서, 어느 누구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스스로 번식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소. 올림포스 신전의 최고 주인 제우스는 '나에게 저들의 힘을 빼앗을 방도가 있다'고 말하고는 벼락을 던져 그 피조물을 둘로 쪼개 남자와 여자로 나누어버렸소. 이렇게 해서 지상의 인구는 훨신 늘어난 반면, 그들은 힘을 잃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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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황하게 되었소. 이제 그들은 잃어버린 반쪽을 되찾아 다시 결합해야만 예전의 힘, 습격을 피하는 능숙함, 피곤과 일을 견뎌내는 지구력을 되찾게 되었어요. 두 개의 육체가 서로 뒤섞여 하나가 되는 결합, 그걸 섹스라고 부르오."

- 등장인물 '랄프 하르트'의 말 중에서, 206쪽


 

쾌락()
국어 사전에서는 '쾌락'을 '유쾌하고 즐거운 느낌, 혹은 감성의 만족, 욕망의 충족에서 오는 유쾌하고 즐거운 감정'으로 풀이하고 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이 '쾌락'이라는 말에 은밀하고, 퇴폐적이고, 부정적인 의미를 덧붙여 사용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개인의 쾌락을 추구하는 삶은 많은 경우에 있어서 그 쾌락을 포기하는 삶보다 가치가 덜한 것으로, 사랑으로 결혼에 이르는 삶의 과정에 있어서도 성적인 욕망과 쾌락은 소설에에서처럼 '생활'을 위한 헌신 다음의 것으로 그 가치 순위를 매기고 있지는 않은가? 적어도 나의 경우에서는 그러하였다.

'쾌락'이라는 말이 부정적인 뉘앙스를 짙게 풍기게 된 큰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우리들에게 내재하고 있는 본능적인 '욕망'(11분에서 가장 큰 고민거리였던, 성적 욕망처럼)들을 은밀한 것으로, 그리고 거리낌없이 드러내서는 안되는 것으로  우리들 스스로 자신의 의식을 강제하고 있다는 사실에 있지는 않을까? 인간에게 내재하고 있는 본능적인 욕망들이 터부(taboo)시 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작가 코엘료는 그 이유를 우리들의 비뚤어진 욕망에서 찾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문제와 관련하여 이야기 속 주인공 마리아의 일기는 나에게 큰 의미로 다가왔다.

옛날 옛적에, 번쩍이는 깃털로 뒤덮인, 멋진 색깔이 완벽한 날개 한 쌍을 가진 새 한 마리가 있었다. 그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올라, 보는 이들을 더없이 즐겁게 해주기 위해 태어난 존재 같았다.
어느 날, 한 여인이 그 새를 보고는 한눈에 반하고 말았다. 그녀는 감탄으로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마구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감동으로 두 눈을 반짝이며 그 새가 나는 것을 바라보았다. 새는 자기를 따라오라고 그녀를 초대했다. 그들은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함께 비행했다. 그녀는 그 새를 너무나 사랑했고 숭배했고 찬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여인은 문득 '혹시 저 새가 머나먼 산으로 훌쩍 날아가버리지는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덜컥 겁이 났다. 다른 새에게는 더이상 그런 애정을 느낄 수 없을까봐 두려웠다. 그녀는 하늘을 나는 새의 능력을 질투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외로웠다. 그녀는 생각했다.
'새를 함정에 빠뜨려야겠어. 다음번에 나타나면 두 번 다시 날 떠날 수 없을 거야.'
역시 여인에게 반해 있던 새가 이튿날 그녀를 만나러 왔다.
새는 함정에 걸려 새장 속에 갇히고 말았다.
여인은 매일 새를 바라보았다. 그 새는 그녀가 불태우는 열정의 대상이었다. 그녀는 친구들에게 새를 보여주었고, 친구들은 "넌 정말 좋겠구나!"하며 부러워했다. 그런데 아주 이상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새가 그녀의 것이 되어 더이상 그것을 정복할 필요가 없게 되자, 새에 대한 여인의 애정이 점점 식어갔다. 더이상 날지 못해 자기 삶의 의미를 표현할 수 없게 된 새는 점점 쇠약해져갔다. 새는 빛을 잃고, 보기 싫게 변해갔다. 여인은 먹이를 주고 새장을 청소할 때를 빼고는 새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새가 죽고 말았다. 그녀는 깊이 상심했고 그때부터 끊임없이 그 새만을 생각했다. 그녀는 새장은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구름만큼이나 높이 날며 행복해하는 그 새를 처음 본 그 날만을 떠올렸다.
그녀가 자기 자신을 조금만 더 세심히 관찰했더라면, 그녀에게 그토록 깊은 감동을 준 것은 새의 겉모습이 아니라 그 눈부신 자유로움, 끊임없이 퍼덕이는 그 날개의 에너지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새가 죽고 나자, 그녀의 삶 역시 의미를 상실하고 말았다. 죽음이 찾아와 그녀의 문을 두드렸다.
"왜 날 찾아왔나요?"
여인이 죽음에게 물었다.
"당신이 그 새와 함께 다시 하늘을 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죽음이 대답했다.
"그 새를 자유롭게 놔뒀더라면, 당신은 그 새를 훨씬 더 많이 사랑하고 숭배했을 거요. 하지만 이제 당신은 내가 없이는 그를 만날 수 없소."

- 마리아의 일기 중에서, pp. 277-280

결국 우리 인간에게 내재한 욕망은 세계 속의 타자(他者)를 내것으로 소유하려는 무모함으로 나아가기 십상이며, 그처럼 비뚤어진 우리의 욕망은 우리 스스로 그것을 떳떳하게 드러낼 수 없도록 우리를 옥죄고 있는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파울로 코엘료의 '11'분은 그동안 남성 중심적인 시각에서 이야기해왔던 성(性)적인 욕망과 쾌락을 여성의 입장에서 솔직하게 풀어냈다는 점에서 그 중요한 의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 소설의 가장 큰 관심사이기도 한 성에 대한 우리들의(남성들의) 비뚤어진  욕망은 돈으로 한 여자의 육체를 소유할 수 있는 섹스 산업을 창궐하게 만들었고, 가정의 위기를 초래하며, 절대 잠자리의 연속이 될 수 없는 사회(예를 들면, 직장) 속에서의 여성들에게조차 남성 상위의 체위를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여성의 오르가슴(orgasme)이 많은 남성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많은 여성들 스스로 그렇다고 믿고 있는 것처럼 질내 삽입에 있지 않고, 클리토리스와와 G스폿에 있으며, 여성의 오르가슴을 위해서는 남성 상위의 체위가 아니라 여성 상위의 체위가 이상적이라는 마리와와 도서관 사서의 대화는 의미심장한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

성에 관한 우리들의 비뚤어진 욕망은 여성을 쾌락 추구를 위한 소유의 대상으로, 그리고 그들을 남성의 밑에서 수동적으로 정복당해야만 하는 존재로 말하는 것을 서슴지 않는다. 잠자리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비뚤어진 욕망의 표출이 사회의 많은 분야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며, 이렇듯 비뚤어진 욕망은 애초에 그 정당성을 확보할 수 없기에 터부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것을 입밖으로 드러내서는 안되는 것으로 금기시함으로써 인간 사회 속의 강자는 약자를 언제나처럼 정복의 대상으로 유린할 수 있는 지위를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닐까?

이런 점에서  파울로 코엘료의 '11분'은 인간의 본능이라고 할 수 있는 성적 욕망을 통해 여성에게, 그리고 사회적 약자에게 폭력을 일삼아 왔던 인간 문명의 비뚤어진 욕망을 파헤치고 고발하고 있는 작품인 셈이다.

여성의 욕망을 금기시하여 클리토리스를 잘라내는 할례 의식을 치르는 아프리카의 부족들을 두고 야만과 미개의 풍습으로 치부하는 것은 크게 보면 우리 얼굴에 스스로 침을 뱉는 행위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다. 우리 역시 아직도 보이지 않는 칼로 할례 의식을 치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창녀 마리아가 성에 대해 알게 된 새로운 것들, 그리고 그녀가 자위를 통해서가 아닌 랄프 하르트를 통해 경험하게 된 오르가슴의 경험을 천한 것으로 말하는 대신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축하의 말을 건넬 수 있기를 코엘료는 바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야기 속 '마리아'는 사회적 약자이며, 그런 점에서 이 땅에 살아가는 우리들 대부분은 '마리아'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마리아처럼 진정한 오르가슴에 대해 눈을 뜰 수 있게 된다면, 그리고 우리가 랄프 하르트처럼 우리의 수많은 마리아들에게 진정으로 오르가슴을 경험할 수 있는 자유로움과 사랑을 선물(?)한다면 아마도 우리 사회의 많은 것들이 달라져 있지는 않을까?

묘한 흥분에 휩싸인 채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던 나에게 남은 물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