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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황석영의 손님 - 화해와 상생을 위한 지노귀굿

 
기독교와 맑스주의는 식민지와 분단을 거쳐오는 동안에 우리가 자생적인 근대화를 이루지 못하고 타의에 의하여 지니게 된 모더니티라고 할 수 있다. 전통시대의 계급적 유산이 남도에 비해 희박했던 북선 지방은 이 두 가지 관념을 '개화'로 열렬하게 받아들였던 셈이다. 이를테면 하나의 뿌리를 가진 두 개의 가지였다. 천연두를 서병(西病)으로 파악하고 이를 막아내고자 했던 중세의 조선 민중들이 '마마' 또는 '손님'이라 부르면서 '손님굿'이라는 무속의 한 형식을 만들어낸 것에 착안해서 나는 이들 기독교와 맑스주의를 '손님'으로 규정했다.

한국전쟁 50주년이던 작년 6월부터 '손님'의 집필이 시작되었다. 또한 작년은 남북정상회담이며 이산가족 상봉 등의 사건으로 남북관계의 실질적인 변화가 시작되기도 했다. 서구에서 냉전이 사라진 지 십년이 지나서야 겨우 변방의 얼음의 녹아내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보니 사실상 무서운 '손님 마마님'은 아직도 미국이 아닌가...

2001년 5월 황석영        <작가의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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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회식자리에서 6.25나, 6,70년대의 뼈저린 가난을 겪은 윗세대들의 경험담을 듣곤 한다. 겪어보지 못했던, 그래서 그들의 아픔을 가슴으로 느끼지 못하고 머리로 이해하려 끙끙대는 젊은 술친구들에게 윗세대들의 이야기는 "참 세상 많이 좋아졌다!"라는 기쁨도, 탄식도 아닌 이상야릇한 감정이 묻어 있는 말로 끝나는 것이 다반사다.

"세상 참 많이 좋아졌다."

내 나잇줄에서는 가당치도 않은 이러한 유의 말들이  적어도 내것으로부터 열 손가락 정도를 더 꼽아야만 하는 '분'들의 입을 통해 나올 때마다 지금도 나는 그들이 커다란 납덩이들을 토해 내 손 위에 툭툭 던져주는 것 같아 버거워 하곤 한다. 그들이 토해내는 것들은 내 눈으로는 도무지 그 형태를 뚜렷하게 파악하기 힘든 것이면서도 웬만해선 녹아내리지 않을 것 같은 묵중한 기운을 지니고 있다.

소설 '손님'의 마지막 장을 덮고났을 때 나는 그것과 비슷하게 한동안 내 손 위에 들린 작은 책의 무게로 역시 버거워해야 했다. 그리고, 이번에도 역시 나에게 찾아온 힘겨움의 이유 또한 술자리에서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미국 헐리우드의 영화 '람보'를 보며 자라난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의 눈에 비친 미국은 언제나 정의의 나라였고, 악의 세력을 무찌르는 힘없는 우리의 구세주였다. 그들의 영화 속에 드러나는 세계관이 허구임을 알아차리게 되기까지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것을 두고 나의 잘못만이 아니라고 변명하는 것이 부끄럽기도 하지만, 어찌보면 그것은 그나마 내가 온전하게 기억하고 있는 어린 시절의 목소리들이 빨갱이를 우리와 미국의 적으로 말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는 데에도 분명히 이유는 있다. 황지우의 시에서처럼 나는 교문 앞에서 받은 할인권 덕택에 200원만 내고 극장에서 로봇 태권 V를 볼 때에도 자리에서 일어서서 애국가를 경청해야 했고, 지금은 통장에 29만원인가 밖에 없다고 발뺌하는 그 당시 큰 어른의 소식을 뚫려있는 눈과 귀로 어쩔 수없이 보고 들어야만 했다. KBS(?)의 '전우(?)'를 보며 멋진 국군들이 '빨갱이'들을 죽이는 것에 환호성을 질렀고, MBC(?)의 '구월산 유격대'의 멋진 활약에 통쾌해 했던 게 나의 어린 시절이었다.

그래, 그렇다.
회식자리에서의 지루한 경험담 끝에 터져나오는 이상야릇한 감정을 담은 탄식만큼이나 나또한 분명 내가 맡았던 유년기의 공기와 지금의 공기가 다르다는 것을 느낀다. 그래, 분명 세상 참 많이 변했다.

황석영이 매번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는 사실이 언론을 통해서 보도되는 것도 그렇고, 그의 작품이 많은 문학 교과서에 수록되고, 매년 수능에 출제될 작가로 선정되고 있다는 것 자체도 그러할 것이다.

이 책을 읽은 많은 사람들이 그동안 남과 북에 의해 왜곡되어 왔던 진실을 파헤쳤다는 데에서 그 의미를 찾고 있다. 서로 다른 정치 체제를 지니고 있는 남과 북은 그간 황해도 해주 '신천리 양민 학살사건'을 각각 공산주의자의 만행으로, 미군의 만행으로 말해왔으나, 황석영은 그 원인을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의 이념 대립으로 인한 민족의 분열에서 찾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작가 황석영이 '손님'을 통해 우리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은 대부분의 소설이 그러하듯이 현시대에 대해 던지는 작가의 화두가 이닐까 한다. 소설 손님의 '화두'는 신천리 양민 학살사건이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와의 이념 대립에서 비롯된 민족 내부의 분열에 그 원인이 있었다는 어찌 보면 부끄러운 우리의 과거에 대한 고백이라기 보다는 그가 후기에서 밝히고 있듯, '우리 시대의 '손님'은 과연 누구인가?'에 그 초점이 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작가 후기에서 밝혔듯이 이 소설의 제목 '손님'이 상징하는 것은 바로 우리 민족의 필요에 의해서 생겨났다고 보기 어려운 당대의 핵심적인 이데올로기, '기독교 이념'과 '마르크스주의'를 말하는 것이다. 서양의 병, '손님' 천연두가 한마을 사람들을 순식간에 죽음으로 몰아가듯, 타의에 의해서 마을 사람들이 가지게 된 이 두가지 이념의 대립은 신천리 마을 사람들은 두 편으로 나뉘게 하고 , 서로가 서로를 죽음으로 몰아가게 하였던 것이다. 필요에 의해 자생적으로 생겨나지 않은 이념의 대립으로 인한 비극, 그렇게 본다면 신천리 양민 학살 사건은 민족 내부의 분열로 일어난 것임에도 불구하고  작가에 의해 파악된 사건의 근본 원인은 결국 외부에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그리고, 새로운 세기를 맞이한 지금 우리가 원하지 않았던 존재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갈라놓는 '손님'은 과연 누구인가?  작가는 '미국'이라는 나라의 이름을 꺼내는 데 조금의 두려움도 없어 보인다.



이러한 내용과 관련하여 얼마 전 인터넷 서핑을 통해 우연히 접하게 된 어느 고등학생(아마도..?)의 패러디 작품이 묘한 여운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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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돌이의 패러디 작품 : 출처 아래 링크 참조


http://blog.naver.com/boradoles2?Redirect=Log&logNo=120032169811 

위 패러디 작품의 원작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아래의 피카소의 것이다. '한국에서의 학살'이라는 제목이 붙여진 이 작품은 황석영의 소설 '손님'이 모티프로 하고 있는 '신천리 양민 학살사건'을 그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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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의 학살(Massacre in Korea)’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 스페인) ·1951년 作 · 유화 109.5x209.5cm



작품 출처 및 자세한 해설은 다음 사이트를 참고▶ >http://eroom.korea.com/post/board.aspx?bid=jik8572&mode=read&view=board&pid=213189&cate=2136&page=1



전쟁을 경험한 어른들은 아직도 '빨갱이'에 대한 적대감을 놓지 못하고 있다. 소설 속에서 요한이 그러하였고, 그는 마지막 죽음의 순간까지 공산주의자들을 적대시한다. ( 소설에서 공산주의자의 만행보다 요한이나 상호를 중심으로 하는 기독교 교인들의 행위가 더욱 잔인하게 그려지고 있다는 점을 비판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에게는 그것이 큰 문제가 되어 보이지 않는다. 여전히 나는 이 소설이 왜곡된 진실을 파헤치는 것 이외에 현시대의 상황에 대해 우리들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결말이 암시하는 바는 상당히 함축적이다.
요섭이 북한 방문을 하기 전 세상을 떠난 요한 형, 공산당의 일원이었다는 이유로 요한의 손에 죽어 간 이찌로(박일랑), 순남이 아저씨 등 죽은자의 환영과, 산 자인 요섭과 그의 삼촌 안성만의 대면이 바로 작품의 핵심 결말부에 해당한다. 그들은 죽은 뒤에 다시 한 자리에 만나 산 자인 요섭과 안성만에게 1950년 마을에 피바람이 몰아치던 당시의 심정을 술회한다. 마찬가지로 살아있는 자 요섭과 안성만도 망령들에게 자신의 속사정을 이야기한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의 속사정을 털어놓는 것으로 그들은 너무나도 쉽게 화해에 이르고 망자의 가야할 길에 오른다.

그렇다. 핏줄을 같이 나눈 사람들... 살아서 총칼로 서로를 죽이던 존재들이지만 망령이 되어서나마 결국 그렇게 화해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 그것이 바로 작가 황석영이 생각하는 '민족'의 개념이 아닐까?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던 순남이 아저씨와 그의 등에 업혀 자라던 요한과 요섭, 이들의 체온을 갈라놓은 것은 과연 그들 스스로인가, 아니면 다른 그 무엇 때문인가?

그리고, 지금 우리는 어떠한가?

황석영의 소설 '손님'이 나에게 던져 준 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