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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은희경,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우유대장이었던 어린 시절. 유통 기한이 지난 줄도 모르고 상한 우유를 먹었던 적이 있었다. 절대 다시는 맛보고 싶지 않은 그 맛에 나는 심한 구토를 했었고, 한 동안 달고 있었던 배앓이로 우리 집을 매일 드나들 수밖에 없었던 우유 배달 아주머니는 애꿎게 발소리를 죽여야만 했었다.

그 후로 나는 내 뱃속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들로 하여금 내 눈과 내 코를 먼저 거쳐가도록 하였고, 비행기에 오르는 승객들처럼 이 두 검색대를 무사히 통과한 것들에게만 내 뱃속으로 들어올 자격을 주었다.  

우리들의 삶과 사랑도 저마다의 유통 기한을 족쇄처럼 차고 있다. 삶의 유통 기한은 죽음이 오기 전까지이며, 사랑의 유통 기한은 권태나 이별이 습격하기 전까지의 황홀한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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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한 우유처럼 삶도 사랑도 '유통 기한이 지나면' 우리를 아프게 하고, 슬프게 하고, 두려움에 떨게 만든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되도록이면 가까이 하려 하지 않는다.


은희경에게 이어서 삶은 '사랑'이라는 황홀한 앞면과 '이별'이라는 아픈 뒷면을 지닌 양면의 동전이다. 우리의 삶에서 사랑만큼 중요한 것도 없으며, 그런 이유에서 산다는 것은 동전 던지기의 연속이다.

하지만 은희경에게는 동전을 던지는 특별한 기술이 있는 듯하다.

보통의 우리들이 던지는 동전의 확률은 정확히 반반이다. 억세게 운이 좋아 앞면만 연달아 100번이 나온 사람도 101번째 딱 한 번 나온 '이별'에 눈물을 흘린다.

하지만 은희경이 던진 동전은 언제나 앞면이다. 그녀가 소설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를 통해 우리에게 넌지시 일러 준 동전 던지기 기술, 그 비밀은 과연 무엇인가?

소설의 제목은 마치 떠나는 남자의 바짓가랑이를 부여잡고 있는 여인네의 처량한 모습과 닮았다. 이별의 순간까지 남자의 마음을 돌리려 안간힘을 쓰는, 혹은 미련과 슬픔 때문에 눈물을 뚝뚝 흘리며 남자의 품에 안겨 빙글빙글 돌아가는 여인네의 모습을 연상한 것이 잘못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싱겁게도 소설의 첫 페이지를 펼치면서부터였다.


셋은 좋은 숫자이다.
오직 하나뿐이라는 것? 이 어리석은 은유는 설명할 필요조차 없다. 당연히 비극히 예정되어 있다. 둘이라는 숫자는 불안하다. 일단 둘 중 하나를 선택하고 나면 그 때부터는 자유롭지 못하다. 결국은 첫 선택에 대한 체념을 강요당하거나 기껏 잘해봤자 덜 나쁜 것을 선택한 정도가 되어 버린다.
셋 정도면 조금 느긋한 마음으로 일이 잘 안 될 때를 대비할 수가 있다. 가능성이 셋이면 그 일의 무게도 셋으로 나누어 가지게 된다.

- 7쪽,  소설 첫 페이지에서


'스스로를 도덕적이라고 여기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진희가 생각하는 사랑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도덕적인 혹은 도덕적인 시선에 길들여진 우리는 '하나'에 대한 감정만을 사랑으로 여긴다. '셋'은 고사하고 '둘'에 대한 감정만으로도 우리는 그것을 '바람'이라고 말하는 것에 망설임이 없다. 나도 그러하다. 그리고, 대부분의 당신들도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강진희는 '셋'을 사랑하면 '하나'를 더 크게 사랑할 수 있다고 믿는다. '하나'에서 오는 집착과 '둘'에서 오는 불안함을 벗어나 더 큰 사랑을 줄 수 있는 것이 바로 '셋'에 대한 사랑이라고 믿는 '나쁜 여자의 전형'이다. 하지만 나쁜 여자의 전형인 강진희를 나쁜 여자라고 함부로 떠벌릴 수가 없다.

 

누구나 마지막 춤 상대가 되기를 원한다. 마지막 사랑이 되고 싶어한다. 그러나 마지막이 언제 오는지 아는 사람이 누구인가. 음악이 언제 끊어질지 아무도 알 수 없다. 마지막 춤의 대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의 상대와의 춤을 즐기는 것이 마지막 춤을 추는 방법이다.


이쯤하면 은희경이 던진 동전이 항상 앞면만 나오는 이유를 알 수 있을 듯하다.
그녀의 동전 던지기는 우리와는 다른 그녀만의 룰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동전 하나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녀의 손에는 언제나 넉넉하게 세 개쯤의 동전이 놓여 있다. 그녀는 세 개의 동전을 동시에 던지는 법도 없다. 늘 하나나 둘은 앞면이 보이게끔 놓여져 있다. 더군다나 그녀는 뒷면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동전 던지기의 즐거움을 회피할 정도로 어리석지도 않다.

말장난, 혹은 속임수 같은 그녀의 이러한 룰은 묘하게도 천박하거나 불결해 보이지 않는다. '지금 상대와의 춤을 즐기는 것이 마지막 춤을 추는 방법' 이라고 그녀가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에 빠져 있는 그녀에게 매 순간은 언제나 마지막이며, 마지막처럼 소중하며, 마지막일 때처럼 진지한 감정으로 충만한 시간인 셈이다.

은희경의 '룰'은 '도덕적이기를 원하는' 혹은 '도적적인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우리와 분명 다르다.  우리는 그녀의 '룰'을 두고 '틀렸다'라고 말하고 싶을 지도 모르나, 그러기에는 우리 스스로가 충분히 도덕적이지 않은 듯하다. 그저 '다른' 것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은희경의 소설에 대한 무례를 범하지 않는 일이 될 것이다.

다만, 유통 기한을 알려 주는 날짜가 지워져 버린 우유를 앞에 두고 마셔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며 주저하는 사람은 그 우유를 절대 마시지 못할 것이라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용기를 내어 마셨는데 하필 그 우유가 상하기라도 했다면 구토와 복통으로 며칠을 앓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유통 기한을 따지지 않고 우유를 즐겁게 마실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에게는 설사 그 우유가 상한 것이라 하더라도, 다음 번에 마시게 될 우유를 좀더 맛좋게 만들어 주는 입에 쓴 약 정도로 생각될 수도 있을 듯하다.


사랑에 대한 '다른 생각'에 대해, 그리고 나의 '지금'과 '사랑'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는 데에 의미를 두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