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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신분증 요구하는 사회

 

개인 정보 불법 유출로 인한 피해 사례를 보도하는 뉴스를 심심찮게 접할 수 있게 된 것은 그리 오래 된 일이 아니다. 요즘 한참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신종 전화 사기 수법에서도 범인들은 피해자들의 개인 정보를 빼내어 돈을 가로챘다.

 이처럼 하도 좋아진(?) 세상이라 요즘은 어딘가에 신분증 사본을 제출하고 나면 왠지 모르게 꿈자리마저 뒤숭숭하다. 어느 때보다도 개인 정보의 중요성과 그 보호의 필요성이 강조되고 있는 지금, 모든 개인 정보를 다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는 '신분증'의 사용은 필수적인 경우에 한하여 극히 제한적으로 허용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 생활 곳곳을 돌아보면 무례하게도(?) 우리의 신분증을 요구하는 곳이 너무나 많다. 한 사례로, 인터넷 서비스를 해지하면서 나의 모든 것이 담긴 신분증을 얼굴도 모르는 상대방에게 무방비 상태로 내어놓았던 오늘의 기억은 절대로 유쾌하지 않았다.

인터넷 서비스 업체의 횡포에 대해서는 이미 뉴스나 신문, 그리고 주위 사람들의 말을 통해 익히 들어왔으나, 이번에 한 업체의 서비스를 해지하면서 직접 겪어 보니 많은 것들이 부당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것들 중에서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불편한 해지 절차와 신분증 사본을 요구하는 관례.

잠깐, 오늘 내가 겪었던 일을 옮겨본다.

인터넷 서비스를 처음 신청하고 개통할 때에 신분증을 요구했던 기억은 없다. 그런데, 전화로 해지를 하려고 했더니 신분증을 복사해서 팩스로 넣어달라고 한다. 그리고, 친절하게도 상담원은 어이없는 마지막 멘트까지 나에게 들려준다.

"내일 오전까지 팩스가 들어오지 않으면 해지 신청이 취소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 팩스.. 많이 대중화 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팩스가 없는 집은 수두룩할 것이고, 팩스가 없는 사람의 경우에는 신분증을 복사해서 팩스로 보내기까지 안써도 될 돈을 써가면서, 그것도 금쪽 같은 시간을 길바닥에 뿌려 가면서 발품을 팔아야 한다.

아무튼 정해지 시간까지 팩스를 넣기 위해 회사에 출근하자마자 신분증 복사해서, 팩스를 보냈다.
잠시 후에 고객센터로 전화를 해서 팩스 도착 여부를 확인하고, 정상적으로 해지되었다는 말을 듣고 전화를 끊었다.

"휴~ 끝났구나."
 전해 들었던 남들의 이야기만큼 시끄럽지는 않게 마무리 한 것 같아 내심 만족하기도 했다.
그랬더니 아니나다를까...

점심 후에 문자 한 통이 왔다.

"고객님 어제 부탁한 팩스 넣어주시기 바랍니다."

보냈는데 웬 팩스? 전화를 했다. 어제 전화한 상담원의 이름을 기억하여 바꿔 달라고 했더니 자기는 팩스를 받은 적이 없다고 한다. 하긴 아침에 통화한 상담원이 이 사람이 아닌 건 분명했다. 하지만, 분명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팩스 도착을 확인하고 해지되었다고 말하였는데...

시시콜콜한 뒷이야기는 접어두자.

아무튼 나는 총 두 통의 팩스와 여섯 통의 상담원 통화를 통해 겨우 내 인터넷 서비스를 해지하는 데 성공했다.

이번 일로 이런 의문을 가져볼 수밖에 없었다.

해당 인터넷 서비스 업체는 왜 해지시에만 신분증을 요구하는 것인가?
인터넷 서비스 해지하는 데 꼭 신분증이 필요한 것인가?
그리고, 전화상담 하기 전에 주민등록번호 물어보고, 휴대폰 끝자리 물어보고, 명의자인지 아닌지 다 파악을 한 상태인데 왜 또 신분증 사본을 요구하는 것인가?

휴대폰 인증이라든지, 공인인증서 인증이라든지, 본인임을 확인하는 다른 인증 절차나 방법도 많은데 왜 해지하려면 꼭 전화를 해야하고, 그것도 모자라 신분증 사본을 팩스를 보내야 하고, 그런 불편을 덜기 위해서는 꼭 대리점을 방문해야만 한다. 가입 신청은 인터넷으로도 다 받으면서 해지는 왜 안되는 것인가?

도대체 얼마나 더 많은 소비자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아야 정신을 차릴 것인가?

가입자를 유치할 때는 온갖 달콤한 유혹과 속전속결의 계약으로 소비자들을 위하는 척하더니, 해지시에는 고객들을 최대한 불편하게 하면서 소비자들을 우롱하는 인터넷 서비스 업체들.
하루 빨리 '환골탈태' 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들이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는 것도 어서 빨리 깨닫길 바란다.
가시는 님의 앞날에 축복을 빌어줄 때에야, 떠난 님도 가끔은 당신들 곁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된다는 것을.

인터넷 서비스 해지를 통해 겪은 작은 경험이었지만, 생각해 보니 그동안 살아오면서 일면식도 없었던 이에게 내 신분증을 내어놓았던 일은 비일비재하였다. 지금도 어느 사무실 책상서랍 속에 들어있을 내 신분증 사본이 어느 날 범죄에 이용되지 않으리라 어떻게 장담할 수 있는가?

개인정보의 보호가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시대.
웬만하면 신분증 보여주지 않고도 편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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